한강하구를 둘러싼 쟁탈의 역사 김포에서 벌어진 전쟁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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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마루
기사입력 2022-05-31 [22:51]

 

삼국시대 패권전략‘한강하구’

심국시대, 한강하구는 중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우며 직접 교류가 가능해 전략적으로 매우중요했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이러한 한강 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가장 먼저 김포를 지배한 냐라는 백제였다. 백제 근초고왕과 근수구왕 집권 당시 김포는 백제의 땅이었다. 하지만 396년 고구려 광개토왕이 임진강과 한강유역 58개 성을 함락시킨데 이어 장수왕의 남진정책으로 김포는 150여년간 고구려 영역에 속했다. 고구려의 막강한 군사력에 대항하기 위해 백제 성왕과 신라 진흥왕이 손을 집았고 551년   백제는 결국 한강 하구를 탈환했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한강을 탐내 오던 신라가 동맹을 파기하고 553년 한강하구를 탈취했다. 고구려가 차지했던 시기에 이곳은 껍포로 불리다가, 통일신라 경덕왕 때 정한 ‘김포' 명칭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고려~조선 외침에 수난당한 김포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김포의 백성들은 몽골과 일본,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끊임없이 수난당했다. 몽고의 침입으로 고려 고종이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자 김포지역을 점령하고 약탈을 일삼있다. 기록에 따르면 몽고군은 1253년부터 1258년까지 4년간 6차례 김포를 점령 했다. 월곶 성동리 일대와 대곶 수안산, 통진 등 주민들의 피해가극 심했다.

고려시대 역사기록물인「고려사절요」에 따르면 몽고군이 거쳐 간 고을들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고 살육된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다고 했다 . 14세기경엔 왜구의 출몰이 잦았는데 1363년(공민왕12) 4월과1366년 9월, 1377년(우왕3)에 대곶과 통진, 하성 등지 에서 노략질을했다.

조선시대 들어서도 김포는 임진왜란(1592)과 정묘호란(1627), 병자호란(1636) 등 국난 위기 속에 피해를 입었다. 왕과 세도가들이 수도를 버리고 강화로 피신할 때마다 희생당했다. 김포는 수도와 멀지 않았고, 강화도라는 요새를 가기위해 반드시 거쳐야히는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19세기중반엔 서양 제국주의 세력이 몰아닥쳤다. 1866년 프랑스함대가 침입한 병인양요와,  미국함대가 덮친 신미양요(1871) 당시 문수산성과 덕포진은 격전을 치룬 장소다. 서양 제국의 최신 화기와 무력도발에 문수산성은 거의 초토화되었고 인근 마을은 화염에 휩싸 였다.

 

2천여 명의 민간 회생자 남긴 ‘6. 25'

군인으로 참전해 전사한 김포출신 사망자는 393명. 민간인 희생자는 이보다 훨씬 많은 2천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민간 희생자들은 전범도 아니고 군인도 아니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기족들까지 이념의 굴레 아래 처단의 대상이 됐다. 죽음은 연쇄적으로 또 다른 죽음을 부르고 광기는 전염병처럼 퍼져나갔다. 유가족들에겐 72년이지난 지금까지도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아있다.

 

우리는 어쩌면 계속 전쟁 같은 시간을 보내고있는것은아닐까

수많은 외침으로 수난당한 김포, 그 수난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아물지 않는 상처를 가지고 실아가는사람들이 있다. 바쁜 일상속에 서 우리는 감각을 둔화시킨채 살아가고 있지만, 가족을 잃은 슬픔으로 여전히 멍든 가슴을 짓누르며 살아가는 많은 이들. 범죄와의 전쟁, 코로나와의 전쟁, 무역전쟁, 입시, 취업전쟁 등 눈 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린 어쩌면 아직 마주하지 않은 전쟁을 너무나 쉽게 빗대어 쓰고 있지는 않은지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전쟁은 상상을 뛰어넘는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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